수학자 가우스에 대해서

by 이상해씨 posted Aug 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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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 (Gauss, Karl Friedrich ) 1777~1855
도이칠란드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1. 생애


벽돌 굽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스는 그 고장 영주인 브라운 시바이크 공의 도움으로 Gottingen 대학에 입학하여(1795년)수학을 전공하였다.


졸업(1798년)한 그 이듬해에 학위를 받았는데 그 때 제출한 논문이 대수학의 기본정리, 즉<실계수를 가진 대수방정식은 적어도 한개의 복수해를 갖는다>를 증명한 것이다.

그는 1807년 신설된 괴팅겐 천문대 대장과 괴팅겐대학 교수를 겸임한 이래 줄곧 그 지위를 지키면서 수학 활동을 평생동안 하였다.

그의 연구성과는 확률론, 물리학, 천문학, 측지학,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를 위대한 수학자라고 하기보다는 위대한 수리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1777년 독일에서 벽돌구이의 가정에서 태어남

1795-1998년 Göttingen대학에서 공부

1795년 2차형식에 관한 상호법칙 발견, 최소제곱법의 발견

1796년 복소수 평면의 도입

1799년 대수학의 기본 정리 증명

1800년 타원함수 발견

1801년 <정수론 연구>를 발표

1807년 괴팅겐 천문대의 대장이 됨

1829년 "최소작용의 원리"를 발견

1831년 Göttingen대학 물리학 교수에 취임

1832년 제량측정의 "절대단위"를 제창

1833년 베버와 함께 전자작용을 응용한 유선전신기 발명

1840년 Potential에 관한 가우스정리를 발견

1855년 사망




2. 업적 및 후세에 미친 영향


수학사에서의 18세기와 19세기의 구별은 가우스를 경계로 삼고 파악할 때 뚜렸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18세기 수학으로부터 19세기 수학으로의 전환은 가우스의 힘에 크게 의존하였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른다.

가우스의 최대 업적은 근대적인 정수론의 건설이었지만, 정수에 관한 이론이 그 범위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우스의 위대한 창조력과 영향력의 근원을 찾아 볼 수 있다.


복소수를 진정한 수학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이것을 정확한 수학적 방법을 써서 나타내는 것은 실로 가우스가 최초였다.

이 '수'는 오랫동안 '허'(imaginary)라는 머리글이 붙어 있었으나, 이것에 수학적 실재로서의 위치를 부여한 것은 가우스이다.

18세기에 있어서의 복소수의 사용은 실수의 체계에 복소수를 형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으로, 수학적 엄밀성이라는 점에서는 다분히 결함이 있었다.

이 약점을 제거한 것이 가우스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수학적 존재로서의 복소수의 지위도 차츰 정립되어 간 것이다.